살인자의 기억법, 기억과 정체성의 탐구

1. 기억의 신경생물학적 접근: 망가진 기억의 조각들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 기억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헤치는 심오한 작품이죠. 주인공이 겪는 기억 상실은 단순한 플롯 장치가 아니에요. 알츠하이머병이나 다른 퇴행성 뇌질환 환자들이 겪는 기억상실과는 다르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기억의 불완전함과 변형 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억은 카메라처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해석되는 과정을 거치거든요. 작가는 이 점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서 과거와 현재,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독자들은 함께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혼란은 단순한 스릴을 넘어,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불안정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마치 퍼즐 조각들이 흩어진 것처럼, 기억의 파편들은 끊임없이 재배열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기억은 해마, 편도체, 전전두엽 등 여러 뇌 영역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고 저장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신경전달물질들이 관여하죠. 주인공처럼 기억이 손상되면, 이러한 신경망의 연결이 끊어지거나 약화되어 기억의 재생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단순히 기억의 ‘손실’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기억의 재구성 과정에 심각한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마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가 손상되어 데이터가 깨지거나 사라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에요. 흥미로운 점은, 기억의 손상은 단순히 과거의 정보 손실뿐 아니라, 현재의 인식과 정체성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의 경우처럼요.

이 소설은 신경과학의 최신 연구 결과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의 불안정성, 기억과 정체성의 밀접한 관계, 기억의 재구성 과정 등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살인자의 기억법’을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작업입니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단순한 스릴러를 넘어서, 기억이라는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거죠.

2. 정체성의 해체와 재구축: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소설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정체성’입니다. 주인공은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갑니다. 그는 과거의 살인 행위와 관련된 기억을 잃어가면서, 자신이 과연 누구였는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죠. 이 과정은 마치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잊혀져 가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축하려고 애쓰지만,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불안정합니다. 마치 조각난 유리 조각들을 붙이는 작업과 같죠. 완벽하게 복원될 수 없는 불완전한 과정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나는 내 기억에 얼마나 좌우되는가?

철학적으로 보면, 정체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속되는 자아의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기억의 상실은 이러한 연속성에 균열을 일으키고, 자아의 일관성을 위협합니다. 주인공의 경험은 우리에게 정체성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재구성되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그 재구성 과정에서 기억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죠.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정보가 사라지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라는 존재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 속 주인공의 고뇌는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줍니다.

이러한 질문은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끊임없이 탐구되어 온 주제입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이러한 학문적인 논의들을 소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친근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달합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죠.

3. 기억과 죄책감: 과거의 그림자

주인공은 과거의 살인 행위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지만, 그 기억의 파편들은 죄책감이라는 형태로 그의 현재를 괴롭힙니다. 그는 과거의 행동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을 느낍니다. 이는 기억의 상실이 죄책감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죄책감은 단순히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죄책감은 심리학적으로 자아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자기 비난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경우처럼 기억이 흐릿해지더라도, 과거 행동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은 그의 정신적 고통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소설은 기억과 죄책감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단순히 ‘죄를 지은 자의 처벌’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넘어서는 더욱 심오한 인간 심리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그림자와 싸워야 하는 고독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죄책감의 묘사는 단순한 스릴러의 범주를 넘어, 심리 스릴러, 혹은 철학적 성찰을 담은 소설로서의 가치를 더해줍니다.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기억과 죄책감의 관계, 그리고 과거의 행동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의 힘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